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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가 이영옥의 "나라가 아직도 나라다워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 여덟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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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재] 소설가 이영옥의 "나라가 아직도 나라다워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 여덟 번째 이야기

 

<목차> 


1. 모든 위정자는 거지 같았다.

2. 권력의 본직과 속성

3. 아직도 정치가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

4. 그래도 아직 버려서는 안될 꿈



3. 아직도 정치가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 (여덟 번째 이야기)


 

우리에겐 아주 오래된 꿈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보다 나은 삶,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끝없는 모색이며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다. 


누구는 그것이 바로 진보를 향한 열망의 표출이라 했고, 비로소 문명에 이르는 도정이며 각성이라고 설파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변화와 혁신의 강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건너왔다. 


변화는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혁신은 더없는 불편함을 강요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현상에 안주하려 한다. 


변화와 혁신은 낯설고 거칠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수구는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대체로 현실주의란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을 뜻한다. 이는 곧 우리네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영위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은 모름지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과 같다.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사람들은 동시에 실용주의자이기도 하다.


실용주의란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당대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새로운 대응방법을 신속하게 모색하는 행동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보수나 진보 모두 변화를 모색하고 희구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다만 상황과 조건에 맞는 점진적 변화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일거에 뒤바꾸는 전면적인 변혁을 이룰 것인지 그 방법과 수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양상의 갈등과 분쟁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겪어온 대부분의 갈등은 계층 간의 대립과 마찰로부터 기인하는 까닭에 비교적 그 주체가 뚜렷하고, 이해가 상충하는 대척점도 분명해서, 문제가 되는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해소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일도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발생하고 있는 갈등과 분규는 그 원인과 양태가 제각각이며, 이해 당사자도 여럿이어서 실체적 진실에 접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특정한 이해집단의 주장이나 논리에 경도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말 또한 결국은 개별적인 이해를 우선하고 강변하는 까닭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든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그 형상이 거칠어지고, 형식이 내용을 담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런 점에 유의하면서 사안 별로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적 사안의 대부분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이 점유한 재화의 불균형으로부터 기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재화의 생산과 소비는 사람들 개개인의 삶의 양태를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곧 사회 구성원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기 보다는 자본축적과 이익증대의 필요와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어왔고,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 사회에 부의 편중과 양극화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심화 고착되기 시작했다. 


2019년 국내 30대 기업집단의 매출 총액이 국민 총생산을 이미 상회했고, 10대그룹의 매출액은 우리 GDP의 60%가 넘는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대기업과 재벌이 이룩한 놀라운 성장과 약진이 가능했던 것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생산성 제고와, 이윤의 극대화라는 미명하에 지속적으로 진행된 노동유연성 제고를 위한 구조조정과 공정 자동화, 사내 하청이라는 기형적으로 형태로 변한 생산형태 곧 아웃소싱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기업의 변화는 같은 일터에서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은 정규직 근로자의 30%에 불과한 700만 비정규직 근로자를 양산했다. 


20년 전 우리 100대기업의 고용 부담율은 전체 고용 인력의 58%에 달했으나 오늘날에는 38%에 미달한다. 따라서 대기업 중심의 투자와 성장이 고용을 창출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부터 우리는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기업 프랜들리를 외치며 대규모 감세를 통해 부자와 기업들의 낙수효과에 의한 대규모 투자를 촉진하려 했던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의 친기업 정책의 실패가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제전문가와 정치인들은 아직도 기업의 대규모 투자와, 경제의 양적성장이나 규모의 확대가 곧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잘못된 꿈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의 생산성 제고를 위해 지속적으로 시행된 구조조정과 공정자동화는 수많은 근로자를 거리로 내몰았고, 이는 결국 중산층의 급격한 붕괴와 신빈곤층의 출현을 초래했으며, 당연히 실업률 또한 증가했다. 정년을 한참이나 남겨놓아 아직도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어중간한 나이에 일터에서 내쫓긴 근로자들 대부분이 얼마 안 되는 퇴직금과 저축, 주택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프랜차이즈와 같은 손쉬운 창업에 뛰어들었고(그들의 80%가 창업 3년 이내에 폐업) 이러한 연유로 우리 주변은 월 소득이 도시근로자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600만 영세 자영업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거지보다 가난한 신빈곤층의 출현은 모두가 정권담당자 들의 정책적 실패 덕분이다.


오늘날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청년실업의 경우 그 원인과 배경이 훨씬 더 복잡하다.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등장한 케인즈의 수정주의 이론이 성공적으로 공황을 극복함으로써 고전적 자본주의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할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모든 나라들의 경제정책과 개발계획의 이론적 근거가 되면서 세계 각국은 경제 규모의 확대와 성장을 국가발전의 유일한 지표로 삼았다. 


고전적 자본주의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다시 수정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로 경제체제가 이행되어 오는 동안, 우리 사회는 대량 생산과 그에 상응한 대량소비가 미덕이 되는 경제체제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질 높은 노동력의 대량공급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산업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각국은 경쟁적으로 양질의 교육을 통해 필요한 고급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인프라 구축과 그에 필요한 제반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고, 이 시기의 교육 연령군에 속하는 청소년들은 당연히 그 같은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친 청년들은 취업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산업 전 부문에 걸쳐 인력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으므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과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대사회가 산업사회에서 고도산업사회로, 다시 지식산업사회와 금융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새롭게 조성된 산업 환경은 더 높은 수준의 전문교육을 이수한 고급 인력을 필요로 했고 이는 교육비용의 폭등을 불러왔으며, 천문학적인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국가는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워 교육과정에 필요한 비용을 교육수요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보다 좋은 일자리와 안락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개인이 지불해야하는 기회비용은 보통의 일반시민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상회함으로써 학업을 마친 청년들 대부분이 융자받은 학자금 상환에 시달리는 채무자의 신분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어야 했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의 룰을 강요함으로써 기업들로 하여금 무한 경쟁을 통한 이윤 창출과 생존게임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압박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기업들은 신기술개발과 설비 자동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제고해야만 했고, 그 결과 고용 부담률이 저하됨으로써 인건비가 현격하게 절감되고 그만큼 이윤이 증가했다. 


이 같은 현상은 기업들에게는 매우 바람직 한 일이었지만 이제 막 취업전선에 나선 젊은이들 에게는 크나큰 재앙이었다. 경제 규모의 확대와 고도성장의 신화도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기존의 어떤 직업군도 젊은이들의 신규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까운 시일 안에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의 젊은이들은 실업과 빈곤의 바다로 내팽개쳐 졌고 그들은 도시근로자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알바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력이 부족해서도, 열정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잘못된 제도와 관행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청년실업의 원인과 실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젊은이들이 기존사회와 기성세대들을 향해 쏘아 보내고 있는 분노와 절망의 화살을 내려놓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의 사안들은 우리 모두가 문제의 심각성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천착하는 일들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청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습득한 어떤 사례와 지식도 이 일을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분되고 다원화된 사회의, 그보다 더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이해가 상충하고 대립하는 복잡한 현상에 적용할 경제이론이나 방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존하는 사회 구성원 모두와 국가 전체의 역량을 집중해도 어려운 문제다. 나라가 나라다워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무엇이라도 팔아치우는 사회로,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 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곧 상품가치와 자본논리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고 제어되는 사회다. 그러면서도 현대사회의 상행위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판다. 따라서 비싼 값에 산 물건일수록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경우가 많다. 


상인들은 어떻게 하면 고객의 지갑을 열게 하고 가격과 상관없이 물건을 사게 할 것인가에만 마음을 쏟는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상품과 상술에는 어떤 감동도 없다.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현대사회는 사람의 가치까지도 이윤의 유무에 의해서 평가하고 인정한다. 사람이 그렇게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이론에 장악된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품과 자본에 의해 일회적으로 소모되어 버리는 사회는 사실상 일체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소멸된 사회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소통하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사람이 타인으로만 존재하는 곳,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어떤 교감도 불가능한 황무지와 같은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며,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고, 간사한 자는 어리석은 사람을 즐겨 속이는 까닭에 불필요한 다툼과 분란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우리가 마주한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가 이 세상의 파멸을 바라지 않는 이상 아무리 작은 희망의 싹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싹을 힘써 찾아 움틔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모든 사회는 인간관계에 의해 존속된다.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유지가 바로 이 사회의 본질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지속되어야 만남이 이루어지고, 만남이 지속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고 스스로 삼가는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사랑이다. 


예의와 사랑은 상대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남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부끄러움은 남과 나를 동일하게 대하는 마음의 근원이며, 나 이외의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연대감의 발로다. 


사랑은 소유하기보다 서로 나누고 교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려 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우리의 소유욕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두려움은 포기나 강요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과 운명공동체라는 깊은 연대감과, 그들 모두에 대한 예의와 사랑, 그 모든 것들과 굳게 맺은 관계를 통해서 현재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인식의 전환,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고하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미래를 조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깊은 천착과 성찰 없이는 어떤 꿈이나 희망도 이룰 수 없다. 이 같은 인식의 대전환을 통해서만 이 땅을 어떤 높낮이도 없이 사람들이 혼자서나, 무리지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야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림] 우리 정치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조망하는 소설가 이영옥의 격정 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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